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之/夜矣卯乙抱遺去如<선화공주님은/남몰래 시집 가서/맛동방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一然 스님이 1279~1282년 집필했던 三國遺事에 향가로 기록한 서동요로 미륵사지석탑 ‘금제사리봉안기’ 때문에 선화공주가 사탁왕후에 밀려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種善因<백제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로 지극히 오랜 세월(광겁) 선인을 심어>라는 내용 때문이다. 이전에도 선화공주의 실존인물이나 ‘신라인‘ 여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선화공주와 사탁왕후를 별개 인물로 전제하고, 일부는 ‘진평왕 딸, 선화공주’를 계속 주장한다.
그러나 작가 이병주의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처럼 역사와 설화는 다르며 역사가는 자신의 학설이 파괴돼도 ‘정확성’이 생명인 만큼 무작정 그런 주장도, “선화공주는 진평왕이나 서동과 관련 없다”는 단정도 금물이라는 점에서 모든 주장을 존중하며 선화공주는 백제인으로 “선화공주=사탁왕후일까?“라는 가설을 조심스레 전개한다. 설령 선화공주가 사실이 아니라도 춘향전이나 흥부전이 허구(fiction)에서 출발한 것처럼 서동설화는 나름대로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우선 선화공주가 “신라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부터 말해보자. 신라 26대 眞平王(재위 579~632)은 아들이 없이 두 딸을 두어 큰 딸 德曼(덕만)은, 황룡사 9층탑을 착수했던 제27대 善德여왕(재위 632~647)이고, 작은 딸은 天明으로 제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 어머니다. 두 딸은 기록됐는데 ’백제왕후‘가 된 셋째 딸만 기록이 없다니.
선화공주는 ‘삼국유사 기이편 권2 무왕조’에 소개될 뿐 金富軾이 1145년 편찬한 三國史記는 물론 왕과 왕후, 공주 및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기록이 세밀한 김대문의 ‘화랑세기’도 선화공주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 동성왕 15년(493)이 신라 소지왕(재위 479~500)때 왕족도 아닌 신라왕족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사실도 기록했는데 훗날 백제왕과 신라공주 결혼 기록이 없다니.
화랑세기에도 진평왕은 마야황후에게 덕만과 천명공주만을 두었음을 기록했다. 마야황후 사후 승만왕후를 두었는데 아들을 한 명 낳았으나 태어난 직후 죽었다고 세세히 기록했으나, 딸을 낳았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사통팔달인 지금도 경주 가기가 쉽지 않고, 사투리가 확연한데 적국 수도에 가서 서동요를 유포시키고 왕후가 준 순금 한 말을 지닌 공주를 백제 땅까지 데리고 온다는 것이 믿을 만한가? ‘산처럼 쌓인 황금’은 서동이 무왕으로 ‘신분적 변화’라는 과도기 상황을 내포할 수는 있어도 어찌 하룻밤에 신라궁궐에 보낸단 말인가? 익산에서 하룻밤에 보낼 궁궐은 사비(부여) 외에는 없다.
어찌 백제가 아닌 적국의 인심을 얻어 백제왕으로 등극하며 진평왕이 미륵사를 세우는데 장인을 보냈다는데 武王(600~641 재위) 즉위 직후인 602년 신라 아막산성(남원 아영)을 공격하는 등 재위 때 10여 차례 전쟁이 있었는데 다른 왕보다 훨씬 많았고 대부분 백제가 공격했을까? 황금을 보내고 진평왕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직후 신라를 무수히 공격하며 재차 미륵사 건립에 도움을 받다니 믿을 만한가? 能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능히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세우시고, 기해년(639) 1월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봉안기 내용은 선화공주가 동탑이나 중앙탑에 별도 봉안기를 남겼을 것이라는 주장과 배치된다.
무왕 통치가 42년간에 달하고, 미륵사 건립이 수십년 걸렸다는 점에서 왕후가 사탁왕후만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선화공주가 별도 발원해 절을 세웠다면 언급도 없이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까? 통상 가람은 사찰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의미해 3塔3金堂3院으로 이뤄진 미륵사 전체로 봐야 할 듯하다. 절이 명맥을 유지했음을 알게 하는 蘇世讓(1486~1562) 문집 陽谷集이나 폐찰 됐음을 알게 하는 조선 영조때 강후진이 1738년 쓴 臥遊錄(遊金馬城記) 및 남태보 군수가 1756년 쓴 金馬志 등 기록과 임진란 직전 기와가 발굴된 점 등에 비춰 1600년 전후 폐찰된 것으로 추정돼 폐사까지 1천년 가량 유지됐다.
위치나 규모는 다르더라도 미륵사는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당연히 존재했던 절인데 몇 가지 내용이 맞다고 선화공주를 진평왕에만 결부시키는 것은 봉안기 안치 640년 이후 쓴 삼국유사를 맹신하는 것은 아닐지? 오히려 선화공주 발원으로 세웠다는 삼국유사와 사탁왕후가 세웠다는 봉안기 내용은 전적으로 상치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眞平과 佐平이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사탁왕후가 오랜 세월이 흘러 선화공주로 둔갑한 것은 아닐지? “선화공주를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하기보다는 “선화공주가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전망해 본다./고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