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해마다 피는 꽃이 아니듯이
날마다 이울다가 차오르는 달맞이, 꽃처럼
기울다가 일어서는 달빛을 따라 피고 지고, 지고 피는 게 꽃이라는 건지
진 꽃을 보며 필 꽃을 그리워하는 이여, 노을자락에 한 송이 시를 그리자면…
졸시「노을꽃」전문 |
북아메리카 나바호족들이 쓰는 언어 중에 ‘호조-Hozho'라는 낱말이 있다. 이 말에는 “아름다움, 건강, 선함, 조화, 행복”을 동시에 뜻한다고 한다. 참으로 함축하는 의미가 다양하고 뜻이 깊은 어휘다.
누구는 언어가 세련되지 못한 상태의 미분화된 원시 부족들의 말투라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매우 효과적인 언어생활의 반영이라고 환호할 수도 있겠다.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일상어로 쓰는 나바호족들의 심성이 순수하고 선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느 편이든 이렇게 단 한마디 말에 인간이 바라마지 않는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나바호족들의 심성은 짐작할 만하다.
내가 바라는 바를 드러내는 희망의 언사가 됐건, 아니면 상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건네는 인사말이 됐건 단 한마디 말에 담긴 의미는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다. 나바호족들이 이 말에 담긴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바호족들의 심성이 그렇게 선하기만 한 것인지, 그것을 따질 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낱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런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낸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본다.
우리에게만 있다는 ‘정情’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이 말을 한글학회에서 편찬한 <우리말큰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이지적 요소에 대하여 감동적인 요소를 일컫는 말”등으로 표현한다. ‘정’에 대한 이런 말뜻을 미루어보면 다음과 같은 우리네 속담이 왜 생겼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 각각 흉 각각” “정에서 노염 난다” “정을 쏟다” “정을 통하다” “정들자 이별” “정들었다고 정 말 마라”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관용어나 속담 등이 있다. 이것은 정이란 말이 반드시 긍정적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나바호족들의 ‘호조’라는 말도 반드시 긍정적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 좋은 의미들이 자꾸만 더럽혀지고, 부족들 사이에서 그 좋은 의미들이 지켜지지 않아 일부러 그런 말을 담아서 다짐하기 위해 쓰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하든 우리 내면에는 ‘호조’라는 말이 지닌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이 담고 있는 선한 의미의 감성을 존중하려는 마음결이 흐르고 있다. 굳이 ‘본질적 가치’를 지향하네, ‘내면적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사람이라면 “아름다움, 건강, 선함, 조화,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지향한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우정을 나누고 살아온 벗이 있다. 사는 곳이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그저 매월 정기모임에서 얼굴을 보며 지내왔다. 그러던 중 그가 꽤 여러 달 모임에 빠졌다. 전해오는 소식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러기를 벌써 두서너 해가 지났다. 그의 부인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가족의 돌봄으로 힘겨운 시간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로 위로를 건네야 할지 망연했다. 산다는 것, 늙는다는 것은 이처럼 아픔을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고 망연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생의 의욕을 놓을 수 없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이런 감성에 젖어 있는 동안에도 봄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무참하게 지고 말았다.
딱한 처지에 놓인 벗에게, 아니 그의 부인에게 내가 보낸 위로의 메시지는 이랬다. “벗이여, 평소의 그 활달하고 유머러스하며 호방한 성품까지는 놓지는 말고 사는 날까지 열심을 내시게. 더구나 지극정성으로 간병에 열성을 쏟아붓는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삶의 의욕을 바투 당겨주시게. 나라고 별수 있겠는가. 나 역시 허약해져만 가는 노화를 겨우 버텨내면서 그런대로 잘 살고 있네, ‘잘 산다’는 것은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책과 동무하기, 음악 감성에 젖어 살기,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기, 영화 때리기, 그리고 시를 데리고 놀기…라네. 아무쪼록 벗의 여생을 응원해 마지않네, 반세기 가까운 세월 함께 나눠온 우정으로 ‘시간의 받침대’를 잘 갈무리하시게.”
생명의 아름다움은 곧 삶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오래 사는 삶’보다 사는 날까지 ‘아름다운 삶’을 선호한다. 그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으리라. 이런 삶이라면 그래도 삶의 아름다움에 버금가는 길이라 믿을 뿐이다.
시력이 허용하는 한 책이 주는 즐거움과 동무하며 사는 것이다. 한정된 사유의 체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색하고 상상하는 데 이보다 더 큰 위로를 다른 데서 찾지 못했다. 음악이 펼쳐주는 세계는 매우 환상적이다. 삶의 호흡을 가지런하게 유지하는 데 클래식 음악은 적절한 소재다. 글쓰기는 내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흔치 않는 거울 역할을 한다. 굳이 자서전이란 표제를 달 필요도 없다. 생각이 미치는 한계를 문자로 옮겨놓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마주하는 동안 나는 결코 이울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어법은 현실이 할 수 없는 세계를 매우 극적인 장치를 통해서 재미있게 보여준다. 영화에 빠져 있는 한두 시간은 그야말로 노화도 잊을 수 있다. 그리고 시 쓰기다.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은 해마다 피는 꽃이 매년 같은 꽃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를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노을 꽃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