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나에게 "왜 사냐?"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여러가지로 말을 하겠지만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통보다는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사실 웃고 즐거울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시인 정병렬님은 '웃음의 미학'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울지마라. 웃어야 핀다. 웃으니 보인다. 울 때에 보지 못한 꽃을….
요즘 같으면 웃을 일이 거의 없다. 끝이 보이지 않게 곤두박질 치는 경제불황에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청년실업, 온갖 비리로 얼룩진 정치권, 연예인 자살 등등….
사회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웃을 일을 찾기 어렵다. 웃음은커녕 우리의 얼굴은 온통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나마 월드클래식에 참가한 야구대표팀의 선전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잠깐이지만 웃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들의 선전을 보며 우리는 며칠간 정말 행복했다. 상대팀을 이길때마다 우리는 모든 고통을 뒤로하고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국민들에게 행복과 웃음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과 싸움을 이기고 혹독한 고통을 견뎠을까? 그래서 며칠의 행복과 웃음은 더 크게 느껴진다.
사람은 즐거우면 자연히 웃는다. 웃는 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왜 사냐?"라고 물을 때 웃음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너무 비약일까? 문제는 웃음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웃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모두들 땀과 눈물과 피, 갖은 노력을 다 쏟아 행복을 비축하느라 안달하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 행복의 열쇠를 쥐고도 그것을 모른채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힘들고 어렵다며 자신을 구박하고 있지는 않은 것인지, 하늘의 별을 딸수 없는데도 그걸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지는 않는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발짝 물러나 '나'를 돌아보고 한번 호탕하게 웃을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사는 게 괴로울때 눈물을 흘린다. 가족, 친지, 재산, 건강을 잃었을 때 눈물을 흘린다. 가지고 있을때는 막상 소중한 것을 모르다가 잃고 나면 거대한 고통이 빈자리를 대신한다.
어떤 이는 자살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거리의 삶을 선택한다. 어떤 이는 마음을 닫고 어떤 이는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고통의 양상은 달라도 우리의 마음은 고뇌와 번뇌로 가득 차 있다. 비슷한 말인것 같지만 고뇌와 번뇌는 다르다.
고뇌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고통을 이해하려는 것이지만 번뇌는 대자연의 섭리에 대한 고뇌라고 할 수 있다. '고뇌한다', '번뇌한다'는 말은 어감부터 괴롭지만 사실 고뇌와 번뇌가 많을수록 잘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영원히 헤어질 것 같지 않은 고뇌와 번뇌를 벗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로 웃음이다. 태어날때부터 웃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태어날때 그 순간을 잊어버려서 그렇지 탄생의 과정은 어마어마한 고통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울면서 태어난다. 그렇게 울고 태어나 울며 살다가 울면서 죽는것이 인생이란다.
'웃으세요. 많이 웃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요즘 사람들은 '웃을 일이 있어야 웃죠'하고 대꾸할 것이다. 그러나 웃어서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지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경우는 얼마 될까? 웃음 하나만으로도 큰 복을 쌓을수 있다.
웃을수록 여유가 생긴다. 웃으면 무엇보다도 고통을 남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을수 있지 않을까.
칼라일은 말하지 않았던가. '웃음이 이 세상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라고. 웃음은 신이 준 선물이다. 어려운 일이 많을수록 더 웃어야 한다. 고통의 명약은 바로 웃음이다.
지금은 너나할것 없이 힘들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힘들다. 죽고싶다. 내 인생이 어떻게 이럴수 있냐며 괴로워 할때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면서 한번 웃어보면 어떨까. '이것이 인생이야'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부안=이옥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