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늦여름— 무주남대천 다슬기강물에 발목을 담그자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갱이나 종아리를 툭툭 건드리는 송사리 떼와 노닐던 기억으로 새벽마다 나를 읽는다
精讀은 情讀을 낳는다 모래알갱이로 빠져나가는 나를 잡을 수는 없지만 송사리 떼, 은어들처럼 청정수에서 노닐 수는 있지만 나의 새벽은 늘 나를 읽는, 언제나 늦여름 무주남대천 다슬기강물이다
만연체 자서전은 언제나 여름이다 [그대를 쓴 계절이 언제나 환절기일지라도] 녹음을 삶아먹고 난 그런 화려체를 읽을 수는 없다 [그대를 읽는 계절이 언제나 서늘할지라도]
건너면 건널수록 깊어지는 누군가의 새벽 강물, 누군가 나의 강물로 걸어서 들어오는 한 세계의 물결, 한 사람의 물고기가 발가락 사이로 혹은 장딴지를 툭툭 건드리며 이 아침을 연다, 나를 낳는다. -졸시「아침 독서」전문 |
‘아침 독서’는 글자 그대로 ‘아침에 책을 읽은 느낌’이다. 사람마다 생활 습관이 다르듯이, 종달새 형의 인간과 올빼미형의 인간이 따로 있는 것처럼, 독서 습관도 역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화자는 ‘종달새 형’이거나, 새벽에 책 읽기를 습관으로 한다.
독서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읽는 일이고, 그것이 마침내 책을 읽는 자신을 읽는 일이 되고 만다. 더구나 자신이 쓴 글-일기나 편지 시 등-을 새벽에 다시 읽는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온다. 그래도 F. 시프테가 한 말 “나는 지금 한 편의 시,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를 음미하며, 독서 행위가 어떤 구체적 느낌과 연결되는지 실감하곤 한다. 독서의 참 의미를 줄곧 생각하며 이 시를 완성했다. 그 맥락의 중심이 결국 인문학적 탐구의 핵심, 사람[생사-사랑]의 문제인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또 있다. 여행 체험과 가족 사랑이 있다. 시적 진술이 때로는 사실의 기록일 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사실을 기록해도 시적 진술의 맥락에 놓이면 전혀 새로운 은유적 맥락과 함축성의 오지랖을 펴곤 한다. 시 쓰기가 갖는 의외의 수확이고 즐거움이다.
‘늦여름’은 실제로 그랬다. 어느 해 온 가족이 늦여름에 무주 남대천 부근으로 휴가를 갔다. 아들네가 휴가 일정을 쉽게 얻을 수 없었던 까닭과 어린 손주들의 학업을 맞추느라 그렇게 늦여름에 휴가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은 청년 시절이 지난 뒤 장년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독서의 재미랄까, 독서의 참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 소년의 기질을 자랑처럼 간직하고 있던 터라, 문학작품 등 읽을거리에 대한 탐구심은 항상 호주머니에 문고판 책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습관화 되어 있었다.
시의 첫 구절 시작은 언제나 난감하다. 마침 휴가를 맞아 자연이 주는 계절의 특색을 그려내야겠다는 발상이 “그해 늦여름”이었다. 이 진술은 사실의 진술이면서, 동시에 어린 손주를 볼 정도의 연치에 이른 필자의 시간적 됨됨이를 함축하기에 적당했다. [어느 시인은 시의 첫 구절 쓰기가 어찌나 어렵고도 신비한지, “시의 첫 행은 신이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이에 비하면 이 작품의 시적 자아는 이어지는 시적 진술을 끌어내기에 안성맞춤인 첫 구절을 저절로 얻은 셈이다.
그리고 한여름과 달리 늦여름이 주는 계절감을 잘 드러내 주었다. 이런 시간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한여름’ 남대천 맑은 물에 발을 담근다면 “시원하다”는 느낌이 더위를 식혀줄 것이다. 그러나 ‘늦여름’에 이 강물에 발을 담그면, 그것도 무주의 늦여름은 대처의 늦여름과는 달리 벌써 가을 냄새를 풍기며 찾아오지 않던가? 그러니 시원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늘하다”고 느낄 만하였다. 그 서늘한 느낌이야말로 책을 읽으며 얻는 독서의 쾌감과 잘 들어맞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또 있다. 어린 손주의 성화에 못 이겨 늦여름 남대천 맑은 물에 들어가 다슬기를 잡기로 했다. 그런데 다슬기 잡기보다는 강물의 빠른 흐름에 발목을 여울목으로 해서 흘러가는 모래알갱이들의 스치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천어 떼 인지 송사리 떼 인지 작은 물고기들이 종아리를 건드릴 때마다 간지럽다며 환호성을 질러대는 손주와 함께 강물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연이든 책이든 자세히 읽으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자세히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대상을 나와 별개의 사물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런 느낌은 자연을 정독精讀하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연이 극복이나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더불어 누리며 살아가야 할 또 다른 나로 읽게 정독情讀하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소설로는 <천국의 열쇠>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도 그랬고, 시는 미당의 <질마재 신화>나 고은의 <만인보>를 읽으면서, 또는 쉼보르스카의 시나 인도의 시성 카비르의 시들을 읽으면서 양의 동서, 시대의 신구, 성의 남녀를 잊게 만들었다. 남대천 맑은 강물에 온몸을 담근 채 정감 있는 느낌의 알갱이들이 내 심미안의 종아리를 쪼아대며 흘러가곤 하였다.
그런 느낌으로 하루를 열어본 사람은 안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가 얼마나 나를 든든하게 하는가를. 한 세계의 물결이 나를 적셔주고, 한 사람의 물고기가 나를 흔들어 깨울 때마다, 나의 아침은 나를 낳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