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산 단풍
강천산 단풍
  • 김규원
  • 승인 2023.10.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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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최규풍/수필가
최규풍/수필가

 

순창의 명산인 강천산으로 가을 단풍 나들이를 나섰다. 해마다 가을이면 연례행사처럼 찾아간다. 강천산은 계곡이 맑고 푸르다. 강천산과 산성산, 광덕산의 양쪽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

마음을 씻는 일은 한자로 세심이다. 강천의 계곡물이 단풍잎을 띄워서 철철 흐른다. 세파에 찌들어 쌓인 번뇌 망상을 세심하기에 얼마나 좋은 곳인가.

24번 국도 담순로에서 벗어나 강천로로 접어드니 메타세쿼이아가 길 양옆에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열병식을 한다. 나무들은 거대한 키에 걸맞지 않게 조금도 우쭐대지 않고 미세한 동요도 없이 정중하게 예의를 지킨다. 사열대를 뒤로하고 감탄의 여운이 아직 식기 전인데 금세 단풍나무들이 달려 나와 우리를 반색하며 맞이한다. 단풍을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이 어느새 단풍 물이 들고, 느긋한 나무들은 울긋불긋 화려한 차림으로 치장한 채 그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패션쇼는 장관이다. 찬 이슬에 떨려 떨어뜨린 살붙이들은 가련하게도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비명을 지른다. 미안하고 안쓰럽다. 빨간 눈, 노란 눈, 주홍 눈들이 내리며 신발 바닥에 푸석거린다.

나뭇가지에 끈질기게 매달린 채 가랑비에 몸을 적신 나뭇가지의 엷은 피붙이들은 황홀한 살빛을 뽐내면서 농염한 유혹을 한다. 아름답고 고운 미색에 반해 넋을 잃고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이처럼 화려한 의상 축제를 차리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올여름에 너무 더워 온몸이 벌겋게 화상을 입고도 쓰러지지 않고, 두 손 벌려 하늘에 기도했을 것이다. 나무들은 지구 온난화의 절망을 딛고 인내하였다. 숨구멍을 막는 지루한 긴 장맛비도 묵묵히 걸러내었다. 단풍나무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을 탓하지 않았다. 기상 이변의 힘겨운 위기에서도 인고를 통해 저리도 고운 빛깔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강천사가 아침을 열고 기다리는 길의 양옆에 줄지어 늘어선 단풍나무 가로수가 오만가지 미소를 걸치고 나의 눈을 빼간다. 눈을 비벼보아도 꿈이 아니다. 개울 건너 나무들이 수수한 옷을 입고서 차마 부끄러워 눈을 가리며 다소곳이 고개 숙인다. 개울을 건너서 만나고 싶다. 파스텔 색조의 자태가 여승처럼 은은하고, 수수하다. 눈앞에 진한 단풍들이 시선을 가로채니 건너편 비탈의 수수한 단풍은 미안하고 애틋하다.

광덕교, 신선교를 지나니 병풍폭포가 기다렸다.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명소다. 사진을 찍느라 길이 막히고 멋진 자세를 잡느라 몸을 꼰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슷하다. 모두가 사진사요 모델이다. 인심이 모이면 민심을 이루고 민심은 곧 천심이다. 하늘의 마음이 따로 있겠는가.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하고 싫은 것을 보면 고개를 당연히 돌린다. 병풍 목포가 일류 스타 모델이다.

도선교, 금강교, 송음교, 극락교를 지나니 일주문이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작년에 오시더니 또 오시네요.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는가? 코로나 19로 못 오시나 싶었어요. 허허, 두 번이나 걸렸다네. 얼마나 힘드셨어요? 자네를 보려고 눈을 부릅떴네. 말은 일주문인데 기둥은 둘이니 이주 문이 아닌가. 농담도 잘하시네요. 기둥이 한 줄로 세워져서 일주문이고, 일심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지요. 그래, 자네 말대로 살고 싶네. 오만가지 번뇌 망상을 나도 제발 떨치고 싶네.

단풍은 일주문 안에도 원색으로 녹아 있다. 봄부터 한여름까지 쉬지 않고 단풍을 잉태한 나무들이 마침내 분만의 고통을 끝내고 수만 가지 형형색색을 안고 자장가를 부른다. 노래에 마냥 취하고 싶은데 내장산이 기다리고 있다. 더 올라가면 구장군 폭포가 장난이 아니다. 산돼지가 새벽 물 마시는 저수지도 있고, 담양읍이 손짓하는 금성산성도 든든하다. 구름다리와 전망대 팔각정이 손을 이끈다. 연봉의 능선을 타고 죽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속속들이 다 보려면 하루가 짧다. 사흘도 부족하다. 아까부터 시간이 그만 내려가자고 재촉하였다. 돌아서는 발길이 못내 아쉽다.

단풍은 우리를 부르기 위해 축제를 연 게 아니다. 쉬지 않고 땀 흘려 살아 온 한 해를 마감하려고 서둘러 마련한 자축연이다.

우리 인생길도 노년에 단풍처럼 아름다운 석양의 축제가 열리면 좋겠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가족을 위해 흘린 땀과 힘들게 살면서 겪은 모진 풍파의 세월이 아름답게 물들면 좋겠다. 지나온 긴 날보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여생이 강천산의 단풍처럼 곱고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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