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벤치에 차린 포목점에서 피륙 한 필을 골라 옷 한 벌을 마름했네
입성 성치 못한 봄날이 언제였던가
나이를 먹을수록 젊어지는 나무, 나뭇잎에 쓰인 일기장엔, 그날처럼 울긋불긋 어휘들이 살아서 팔랑거리는데
실핏줄 흐르는 강물에 비춰보니 여름을 푸새하느라 갈 길 바쁜 갈옷만 바람의 우수를 따라 나부끼며 흘러가고 있네
-졸시「단풍잎을 입다」전문 |
무상無常이란 말을 만나면 뜻의 파장이 망설여진다. 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따라 모든 것이 헛되고 보람도 없이 무너지는 쪽을 따라 귀를 쫑긋한다. 그런 다음 모든 현상이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다는 편에서 나를 끌어당기기도 한다. 그 어중간에서 돌출하는 파장은 ‘인생무상人生無常’에 닿는다. 앞의 뜻을 빌어 보자면 인생마저 아무 보람도 없이 헛되고 덧없는 것이라는 깃발이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상에서 새로운 움이 돋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삼라만상은 계속해서 나고[生] 자라고[老] 변하여[病] 마침내 그대로 있을 수 없음[死]에 닿게 되지 않느냐며, 내 안의 우문愚問이 현답賢答을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만다. 현답은 내가 찾을 수 없는 영역에서 나를 힐끔거리며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아무리 궁리해도 인생무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음이다. 결국 그 전[과거]에도, 그 이후[현재]에도, 그리고 그 다음[미래]에도 변하여 사라져 버릴 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무상은 마침내 무아無我로 이어져 변화무쌍한 만상 가운데 나도 결국은 무화되고 마는구나, 자답하며 가을바람이 휩쓸고 간 공원의 벤치에 몸을 부린다. 그러다가 깜짝 현답을 듣는다.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공원 벤치에는 울긋불긋 온갖 물감으로 치장한 단풍잎들이 제자리가 여기라는 듯이 차지하고 앉아 있다. 나도 그 단풍잎에 몸을 부린다.
바람은 어느새 여름의 습기를 모두 날려버린 채 삽상하게 얼굴을 어루만진다. 저절로 눈이 감긴다.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슬며시 그 손길 거두다가, 또 다시 돌아와 내 얼굴이 궁금한지 바람은 손길을 더한다. 그럴 때마다 짜증나게 지루했던 여름을 까맣게 잊고 만다. 그런 여름이 있었기나 했던가, 기억은 어느 새 더 먼 날을 더듬는다.
그러다가 문득 까무룩 삽상한 바람자락이 몰고 온 햇볕을 이불 삼아 가을 잠에 빠진다. 잠속인지, 꿈속인지, 그도 아니면 잠이 불러온 꿈결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비몽사몽 반수半睡 상태의 어느 지점인지, 온몸을 휘감은 단풍 나뭇잎을 걸치고 있는 나를 본다. 이렇게도 호사스러울 수 있을까, 이렇게도 내 몸에 맞는 옷이 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다.
환각幻覺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미몽迷夢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삶의 전선이 항상 실체적 현상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며 살아왔다. 시나 소설을 읽으며 떠올리는 모습은 언제나 환각 상태였던 적이 많았다. 마치 그런 류의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실감 있게 문학에 빠지는 것은 현실이 잃은 것을 환각 닮은 영상미를 통해서 보상 받기라도 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예술 행위의 본질이 그렇듯이.
미몽 역시 마찬가지다. 꿈을 꾸거나 무엇에 홀린 듯 정신 기운이 맑지 못하고 얼떨떨한 상태를 실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유혹에 빠져서, 그도 아니면 뭔가에 몰입하여 그게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헤매고 다닐 때의 상태는 미몽일 때 느낄 수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도 완전히 미몽에 빠지지 않고, 환각을 실체로 받아들이기 전에 대부분의 불행은 미완의 엔딩 자막을 비가悲歌와 함께 올리곤 했다.
환각이나 미몽에 시달리던 때는 “입성마저 성치 못했던 봄날”이었다. 의식주의 불안을 봄날부터 맛본 사람만이 안다. 세상이 아무리 넓고,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미숙한 까까머리 벌거숭이 한 몸 감쌀 피륙 한 감 얻을 수 없는 막막함, 하루 한 끼나마 따뜻하게 넘길 수 있는 국밥 한 그릇이 그리운 허기짐, 온돌방은 고사하고 구공탄 한 개로나마 냉기를 거둘 수 없는 냉혹함, 이런 비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개를 환각과 미몽에서 얻을 수도 있다는 것, 입성마저 부실했던 내 봄날의 자화상이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는 나무”를 발견한 것은 자연에서 얻은 현답이었다. 현답을 찾아 헤매던 내 젊은 날이 있었기에, 내 여름날 일기장에는 푸른 어휘들이 성장점을 채우는 자양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수정할 수 있는 단서였다. 그것은 바로 ‘영원히 불변하는 것도 있다’는 발상이었다. 무상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무상은 생로병사의 단위를 ‘나’로 한정한 단견이다. 그 단위를 ‘나’를 뛰어넘어 ‘영원히 되풀이되는 생명원리’로 볼 때, 아연 무상은 또 다른 영원이 될 수 있겠다.
그런 단서를 자연의 현답에서 찾는다. 올해의 봄이 작년의 봄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내년의 봄과도 무엇이 다르겠는가! 올해의 단풍나무 옷을 입고 보니 제대로 보인다. 이것은 잠도 아니고 꿈도 아니다. 나아가 환각도 아니고 미몽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하는 자연이다. 연속되지 않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반복되지 않는 계절은 계절이 아니듯이.
다만 자연의 길에 훼방을 놓는 무지한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을 뿐이다.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어지럽히는 우둔한 인간의 행태를 거둘 수만 있다면, 세월로 푸새한 갈옷을 입고 바람의 우수를 따라 흘러간다 한들 섭섭할 일은 없겠다. 계절의 옷을 입고 보니 무상마저도 영원의 다른 이름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