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정치를 기대하며

월요일 아침에

2024-09-01     김규원
김규원/편집고문

지난달 29일 윤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이 있다길래 지켜보았다. 그 브리핑을 보고나서 도대체 나는 어느나라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여태 나는 한국인라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대통령이 말하던 자리 앞에 놓은 영문 글귀였다. ‘The bucks stop here’라는 문구가 적힌 갈색 명패 같은 물건이 왜 대국민 브리핑 탁자 앞에 놓여 있는지 궁금했다. 세계인이 칭송하는 우리글 한글 정도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알아보니 그 명패처럼 생긴 물건은 지난해 5월에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 때 선물한 물건이라고 한다. 그 영문 문구는 미국 33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다고 한다. 하필 그 명패를 앞에 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국민은 궁금하다.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풀이할 수 있는 이 영문 문구를 앞에 두고 대국민 브리핑을 한 심사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믿어달라는 뜻이었다고 좋게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뜻은 좋지만, 여태 누구도 아무것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윤 대통령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힘을 모아 일찍부터 꼼꼼하게 대비했고,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께서 적극 협조해주셔서, 대규모 재난 없이 여름을 무난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라고 자연재해에 시달리지 않은 것도 대비를 잘해서라고 치켜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진 내용은 “2008년 한일 수출 격차가 무려 3600억 달러에 달했고, 2021년까지도 1000억 달러를 웃돌았는데, 불과 3년 만에 일본을 턱밑까지 따라잡고, 이제 세계 수출 5대 강국의 자리를 바라보게 됐습니다. 과거에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이, 눈앞의 현실이 된 것입니다.”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말했는지 모르지만, 세계은행이 발표한 2023년 세계 수출금액 통계를 보면 한국은 약 6,326억 달러로 8, 일본은 7,123억 달러로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도 약800억 달러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올 상반기 수출액은 일본을 따라잡았다.

이어서 기업의 창의와 혁신을 북돋우기 위해 킬러 규제들을 과감하게 혁파했고, 622조 원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을 비롯해서,첨단 산업 발전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정부는 작년에 R&D 예산을 대폭 삭감했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러한 노력들이 경제 성장으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지난 7IMF는 올해 우리의 성장률을 2.5%로 전망했는데, 이는 미국 2.6%에 이어 주요 선진국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준입니다.”라고 말했다.

IMF의 한국 성장률 전망이 2.5%인 것은 맞다. 그런데 우리 전문가들은 그 전망이 타당하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다. 상반기 수출 실적과 1분기 성장률을 감안한 수치이지만 글로벌 환경이 녹록치 않고 물가고와 불안정한 고용시장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 “저와 정부는 성장의 과실이 국민의 삶에 더 빨리 확산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민생에 큰 부담이 되는 물가를 잡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시행한 결과, 전년 동기 대비 물가상승률이 최근 4개월 연속 2%대를 기록하며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습니다.”

2022년과 지난해 물가가 3%대 상승률을 넘나들면서 외식비 등은 50% 이상 올라 어떤 품목은 거의 2배에 이르기도 했다. 내년 공무원 봉급을 3.0% 인상한다고 발표했지만, 아직도 오르는 물가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에 인상한 공무원 봉급을 수령할 즈음이 되면 물가가 먼저 오르게 되고 결국 인상의 효과는 하나마나 헛짓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문제는 브리핑 내용에 있지 않다. 그동안 이어진 여러 문제 가운데 잘 못된 일은 누군가 책임져야 하고 책임자의 사과도 필요하다.

그런 뒤에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고치고 달라지겠다는 각오가 보여야 하는데 도대체 그런 일은 기미조차 없다. 다 잘 돼가고 있고 책임질 일도 없다는 대통령의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 더구나 잇따라 나오는 인사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편향적인 인사에 대해 지적하자 인사에서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만 본다는 대답을 했다. 그 사람의 생각이나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바람직한 인물인지 살피지 않는다면 일방적으로 충성하는 인물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말한 대목은 이해부득이었다. 여소 야대 국회를 두고 국회가 정부 여당의 편이 아닌 것을 처음 경험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잘했더라면 108192석이라는 결과가 나왔을까?

총선에서 나온 민심에 대해 전혀 반성하거나 고쳐볼 생각이 없고 내 맘대로 그냥 밀고 가겠다는 게 브리핑의 요지였다. 왜 총선에서 패했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이상한 정치를 이어가면 국민만 불행해진다.

국민 앞에 부실한 부분에 대해 사과하고 고칠 것을 약속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약속을 하는 브리핑이 아니었다. 부실한 정치를 책임질 사람이 없는 정치를 해왔고 앞으로도 자 잘못 따위를 가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인식세계에 국민은 혼란스럽다.

대통령의 책상에 멋지게(?) 놓아둔 그 ‘The bucks stop here’(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명패는 바이든의 선물이라는 의미 외에 본디 뜻은 없는 것일까? ‘처음 보는 국회와 마치 남의 이야기 같던 브리핑,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던 기자회견까지 829일은 너무 어려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