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격다짐으로 빚은 의료대란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수준이었다. 한국에 치료와 시술을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이 점점 증가할 만큼 남부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잘난 대통령실의 정책 시스템이 자랑스러운 의료 시스템을 한 번에 뭉개버렸다.
지난 2월, 정부가 의료개혁을 내세워 의대 정원을 한꺼번에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이에 반발한 서울대 병원을 비롯한 5대 병원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떠났다. 역대 정권이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성공하지 못한 의사 정원 확대 문제였다.
시도가 있을 때마다 의사들이 휴진 등 방법으로 저항하면 정부가 하릴없이 주저앉는 식으로 번번이 실패했던 일이다. 검사 정권이니 누구든 까불면 잡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덜컥 2,000명 증원을 발표하자 일부에서는 총선을 앞둔 전략이려니 했다.
전공의가 현장을 떠나자 각 지역 대학병원의 전공의들도 동조하여 현장을 떠나고 시일이 지나면서 대학병원 교수들도 자리를 비워갔다. 정부는 수도권을 제외한 각 지역 대학에 2025년 의대 정원을 배분하면서 1,509명이 늘어난 4,567명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국립대학 학생 정원은 교육부가 정하는 게 아니라 학칙으로 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학칙은 교수평의회에서 가결되어야 개정할 수 있다. 전북대는 최근에 가결했지만, 제주대, 경북대, 경상대 등은 절차를 진행 중이고 반대 의견이 팽팽하다는 정보다.
의사들의 밥그릇 지키기 싸움에 정부가 밀리지 않고 강행하는 데 대해 처음에는 상당한 지지여론이 있었지만,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의료공백이 심화하자 민심이 흔들리고 있다. 무리하게 한꺼번에 2,000명을 내놓아 반발을 불러온 데 대한 환자 피해 때문이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곳곳에서 응급센터 가동을 멈추거나, 의사 한 두 명이 지키고 있어서 당장 응급상황인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이 진료 현장을 떠나거나 진료를 거부하는 일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을 뻔히 예상했을 터인데도 막무가내 고집을 설득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상호 조율을 거치지 않는 채 밀어붙인 후유증은 심각하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 속에서 물 흐르듯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 피해는 몽땅 국민의 몫이니 답답하다.
이처럼 삐걱거리는 정치가 앞으로도 2년 반 가까이 이어질 걸 생각하면 고구마 서너 개가 목구멍이 걸린 것처럼 갑갑하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어느새 2년 반이 흘러갔구나…, 하며 어찌 어찌 견디다 보면 막힌 가슴이 뚫어질 날도 그리 멀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답답함 속에 이번에는 간호사들이 들고 일어섰다. 전공의가 현장을 떠나고 의사들도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간호사들은 때로는 의사들의 몫까지 감당하면서 지쳐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업무 과부하에 시달리면서 의사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수를 더 달라고 나섰다.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병원을 대거 떠나 의료 공백이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간호사, 의료기사 등 다른 보건의료 노동자까지 파업에 나서면 의료 현장의 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24일 민주노총 산하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에 따르면 노조 소속 61개 사업장(공공병원 31곳·민간병원 30곳)의 응급실·중환자실 등에 근무하는 필수유지 업무 인력 제외한 조합원들이 오는 29일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나섰다.
이들 61개 사업장 조합원 2만9705명을 대상으로 지난 19~23일 파업 찬반 투표를 진행한 결과 조합원 2만4257명이 참가했고, 2만2101명이 찬성해 찬성률 91.11%를 기록한 데 따른 것이다. 이들은 임금 인상과 인력확충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병원 측에 총액 대비 6.4%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지난 2월 전공의들이 대거 사직한 후 병원들의 경영난이 악화하고 있어 노사 간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노조는 임금인상 외에 주4일제 시범사업 실시, 불법의료 근절과 업무 범위 명확화, 인력확충, 간접고용 문제 해결 등도 병원 측에 요구하고 있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고 진료 자체가 줄어 병원을 운영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간호사와 유관 직종 노조원들이 임금을 올려달라니 병원도 답답할 일이다. 이들 노조원의 70%가 간호사인데, 최근 반년 동안 고생한 만큼 보수를 더 달라는 요구도 지나친 것은 아닐 터이다.
더불어 간호사들은 “의사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단 며칠간의 교육으로 진료지원(PA)간호사 업무를 하며 몇 배로 늘어난 노동강도에 번 아웃 되면서 버텨왔다”면서 “더 이상 의사의 업무를 체계화된 교육 과정과 자격 요건도 없는 일반 간호사들에게 떠넘겨 의료사고 불안에 시달리는 불법 의료로 내몰지 말라”고 요구했다.
정부가 의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간호사들에게 간단한 교육만으로 의사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게 한 일 자체가 잘못된 조치였다. 간호사들의 말대로 교육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고 자격도 없는 이들에게 의사가 할 일을 시켜 의료사고가 나면 그 책임은 몽땅 간호사가 져야 한다.
순서와 타협이라는 절차를 무시하고 전문 분야를 상식 선에서 해결하려는 이 정부의 방식은 군사독재 시대에도 없었다. 사전에 충분히 교감하고 최선의 접점을 찾아 일을 풀어나가려는 노력 없이 즉흥적으로 몰아붙이는 정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오로지 권력의 힘으로 매사를 해결하겠다는 초보정치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막무가내식 정치는 일시적인 작은 문제일 때 한 번 써먹는 방법이다. 의료대란만 아니라 지독한 더위 속에서 물가고를 견디는 다수 국민은 진정 죽을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