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틀막 정부와 자유민주주의 정상회의

2024-03-17     전주일보
김규원/편집고문

누구든 정부나 대통령을 비판하는 자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실제 상황을 통해 보여준 강성희 의원 입틀막 사건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위 수여 식장에서 대통령에게 R&D예산 증액을 말하다가 입틀막 당해 끌려 나갔던 사건을 기억한다.

두 사건에서 얻은 교훈은 누구든 대통령에게 경로를 거치지 않고 말할 수 없고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혼난다는 메시지로 보인다. 요즘 대통령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온갖 선심 약속을 남발하며 만나는 시민들도 아마 사전에 대본을 받고 말하는 것이지 싶다.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대통령을 뽑았고 그 효력은 아직도 3년이나 남아서 앞으로 어떤 문제가 터질지 걱정스럽다.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은 국민의 큰 머슴이어야 하는데 큰 어른을 모셨으니 문제다.

힘쎈 대통령과 함께 보좌하는 대통령실 구성원이나 내각도 막강(?)한 진용을 구축했다. 지난 시절 숱한 문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낸 인물과 극우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실 황상무 시민사회 수석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14일 황상무 수석은 출입 기자들과 식사 자리에서 예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에 대한 의견을 말하다 군대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언론인 회칼 테러 사건을 언급했다고 기자협회보가 전했다.

MBC 보도에 따르면 황 수석은 “MBC는 잘 들어라고 말한 뒤 내가 정보사 나왔는데 1988년에 경제신문 기자가 압구정 현대 아파트에서 허벅지에 칼 두 방이 찔렸다고 말했다. 아직도 불편한 MBC에 대한 협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말이다.

황 수석이 언급한 사건은 198886일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이 출근길에 서울시 강남구 삼익아파트 대로변에서 괴청년 3명에게 흉기로 테러를 당한 사건이다. 황 수석은 MBC에게 잘 들으라고 했냐는 질문엔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했단다.

기자협회는 황 수석의 막말 행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5·18 민주항쟁과 관련해 북한 개입설에 사실상 무게를 싣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개탄스럽기 그지없으며 황 수석의 발언은 국민 소통에 나서야 할 임무를 방기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국론 분열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기자협회는 15일 성명을 내고 기자를 겨냥한 대통령 핵심 참모의 회칼 테러 발언은 충격적이라며 황상무 수석의 발언은 전후 사정을 볼 때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언론 협박이다. 평생 군사독재에 맞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오홍근 기자에 대한 만행을 태연하게 언급한 것은 언론의 비판이 불편하다고 느끼면 모든 기자를 표적으로 테러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위협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황 수석의 언론 협박은 농담 수준이 아니라 현실로 보인다. 대통령의 말을 비틀어 만든 영상은 접속이 차단되며,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언론사들이 무더기로 압수수색을 받거나 공개된 회의의 취재를 거부당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2년간 벌어진 언론자유 침해 논란만 해도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 배제, 공영방송 사장과 진행자·제작진 교체, 언론사 압수수색,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주도하는 정부 비판 보도에 대한 무더기 중징계까지.

문제는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다른 언론까지 위축되는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기사나 보도가 제재받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소극적으로 취재·보도하게 되고, 권력 감시가 위축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나라에서 18일부터 20일까지 서울에서 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한다.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세계 민주주의 진영의 결집을 위해 미국 주도로 지난 2021년 시작됐으며, 미국 아닌 국가가 대면 회의를 단독 개최하는 건 한국이 처음이다.

스웨덴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 브이뎀)가 최근 공개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지수(LDI)20220.73에서 20230.60으로 하락해 국가별 순위 또한 28위에서 47위로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LDI는 선거민주주의, 삼권 분립, 표현의 자유 등을 종합적으로 산출해 0부터 1까지로 나타낸 것인데, 1에 가까울수록 민주주의 수준이 높은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특히 한국을 독재화(autocratization)가 진행 중인 나라로 꼽았다.

보고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권력 남용을 보였다면서 성평등에 대한 공격과 전임 정권에 대한 강압적인 조치 등이 LDI 지수의 하락을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과연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독재화가 진행 중인 나라로 꼽히는 이 부끄러운 현실을 실증으로 보여준 일이 입틀막 사건들이었고 이번 황 수석의 MBC 기자에 대한 협박성 발언이었다. 입으로만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말하는 건 모순이다.

UN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 훼손에 심각한 우려를 두고 아이린 칸 UN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사실조사를 위해 방한 요청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칸 보고관의 방한 요청에도 아직 회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단 한 차례도 공식적으로 국민 앞에 사과하지 않았고 점점 국민에게서 멀어지는 듯 권위를 쌓아가는 건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 과연 어떤 사례를 들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말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