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 나라의 빚 살림 이야기
세상에서 양심이니, 체면이니 하는 기본적 인식이 사라졌다. 그저 나만 좋으면 되고 누릴 줄만 알고 지켜야 할 기본 같은 건 아예 잊은 지 오래다. 뻔뻔한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며 ‘마이웨이’를 외치고 있으니 그런 인식이 유행처럼 번져 간다.
속이 빤히 보이는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며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시대다. 부끄럽다거나 양심에 괴로워하는 기색 따위는 오래전에 벗어 내던졌다. 그런 작태를 보는 국민의 눈도 무디어졌는지 으레 그렇거니 하는 생각인지 그냥 그 꼴을 보고 견딘다.
하긴 요즘 생활인들은 그런 시시비비를 가릴만한 정신적 여유도 없다. 경제 성장기에 소비 패턴이 고급화하면서 입맛도 덩달아 귀족화하고 눈도 높아져 씀씀이가 커졌다. 웬만하면 명품 가방 안 든 사람이 드물고 입는 옷도 유명 브랜드여야 한다.
수입은 줄거나 제자리인데 그런 소비재들 가격이 훌쩍 올라 지갑은 늘 비어 허기져있다. 그 비어가는 지갑을 채우려니 좌우 돌아볼 여유가 없는 건 당연하다. 그렇게라도 채울 수 있는 이들은 그래도 괜찮은 이들이다.
한때 빚을 내서 집 장만하는 게 유행이던 시절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마련한 젊은이들은 고금리에 이자를 내기도 벅차 자꾸만 빚이 빚을 키우는 적자 살림에 지쳐간다. 가계부채가 사상 최대치에 이르고 나라 빚, 자치단체도 빚도 언제 터질지 모르도록 부풀어 있다.
내년 특별자치도라는 이름표를 단다는 전북의 살림살이도 11년 만에 지방채를 발행해야 하는 모양이다. 정부 살림부터 적자로 꾸려가는 판이니 가난한 전북이야 적자가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이름만 특별자치도이면 뭔가?
지난 9일 전북도는 내년 예산 9억 9,842억 원을 편성하여 도의회에 제출했다. 물가 상승률도 반영되지 않게 줄어든 예산을 얽어 맞추면서 지방채 310억 원을 발행한다. 특별자치도로 출범하지만, 과연 무엇이 특별한지 알 수 없는 특자도 첫해인 모양이다.
전북도는 지방세와 보통교부세가 올해보다 2,300억 원 이상 줄어 어쩔 수 없이 지방채를 발행한다고 설명했다. 전북도가 지방채를 발행하면 빚이 5,4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나라와 자치단체가 모두 빚쟁이이고 개인 빚도 빵빵하게 부풀어가는 판이다.
전북 예산이 이런 형편이면 도내 각 시군 예산도 교부세가 줄어 편성이 어려울 건 당연하다. 그동안 매년 예산액이 늘고 복지 예산도 자리 잡아 가는가 했는데 부족한 재원을 어떻게 메꾸어 갈지 걱정이다. 총선을 앞두고 선심 예산은 또 얼마인지 모른다.
정부가 편성해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은 656조 9,000억 원이다. 예산안의 특색은 그동안 매년 증액되어 온 R&D 예산이 16.6%나 줄었고, 전북의 새만금 예산을 뭉텅 삭감했다. 지난달 말에 제출된 예산은 그동안 국회 심사를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지난 6일 정책위와 국회예결위원회 간사인 강훈식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정책위 부위원장인 김성주 의원이 내년도 예산안 국회 심의 방침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당은 민생‧지역‧미래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새만금 사업, 연구 개발, 재생에너지, 보육 지원, 미래세대 예산 등 5대 미래 예산과 지역사랑 상품권, 청년교통 3만원 패스,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 지원, 소상공인 지원, 전세 사기 피해 구제 예산 등 5대 생활예산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R&D 예산이 갑작스레 감액된 데는 윤 대통령의 R&D 분야 관련 불편한 생각을 내비친 것이 즉효를 발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연구개발비 6조 원이 줄어들고 연구 인력들이 곳곳에서 일자리를 잃는 참사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현실이다.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예산이 반영되려면 그만큼의 세입예산이 따로 필요하다. 세입 결손으로 올 예산도 비정상적으로 집행해온 마당에 따로 재원을 마련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내년도 예산안은 상당한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그래 저래 진통을 겪으며 늘어날 것은 채무액이 될 것이다. 앞서 지적한 내용처럼 나라와 자치단체, 개인이 모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빚더미에 눌려있다. 더구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각 자치단체 예산도 선거에 대비한 거품이 더덕더덕 덧칠하고 있을 터이다.
잘나가던 한때의 소비 패턴을 현명하게 줄이고 알차게 꾸리지 않으면 오래지않아 상당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소비 패턴도 진화해야 한다. 풍족할 때의 버릇을 그대로 이어가는 건 결국 퇴출 수순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체감하는 경기 위축이 드러나고 줄어든 소비로 인해 잘나가던 외식 업소들이 현상 유지에 안간힘을 한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코로나19 팬데믹에서 가까스로 풀려 막 살아나려던 경기가 다시 오그라드는 과정이다.
이런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우르르 몰려 따르는 데 매달릴 게 아니라, 정밀한 판단으로 자금을 풀어 소비 진작 시책을 쓰든가, 알뜰한 소비를 유도하든가 하는 등의 적절한 정책이다.
심각한 경제위기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는 상황인데 아직도 권력 맛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국정을 즉흥적으로 흔드는 일은 지극히 위험하다. 일관성 있게 목표를 제시하고 늘 최선의 길을 탐색하여 깃발을 앞세우는 정치가 다급하다.
나라 살림은 살림 전문가에 맡기고 그 경과를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길을 찾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 살림살이는 실패해가며 배우는 게 아니다. 작은 실책에도 숱안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여 파산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21세기,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건너는 때다. 제발 기분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실험 정치는 그만두어야 한다. 그동안 저지른 실패만 해도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수습할지 말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