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메시지들”

시상수상詩想隨想 -32

2023-09-11     김규원

 

 

그저께는 잠에서 깨자 가슴이 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생수 한 잔으로 달래고 보니 숨쉬기가 편안하다

 

어제는 불혹의 여린 아들을 돌보는 칠순 아비의 시를 읽다가

되우 심한 눈물바람을 했다, 그가 맞은 우울한 행복 때문에

 

오늘은 아내와 편백나무숲길을 맨발로 걸었다

이명이 받은 하늘 흐린소리에 접지하여 땅의 응답을 더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빛과 그늘로 오는 내 일을 안다는 것

누구에게나 가는 분명한 신호를 내 몸이 받아들인다는 것

 

-졸시수시로 수신하는 메시지들 때문에전문

 

무수한 전파가 우주를 뒤덮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들을 통해 수십억 인구가 그보다 수십 배도 더 많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다. 그러느라 온누리는 전파들의 세상인 셈이다.

우주 어딘가에 인간과 유사하거나, 인류보다 더 진화 발전한 외계인[생명체]가 있다면, 그들도 무슨 신호를 보낼 거라고 상상한다. 인간은 상상에만 그치지 않고 그들의 신호를 잡아내겠다며 거대한 안테나를 작동하는 지구인들이다.

그런데 인간은 정작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서 수시로 발신되는 메시지를 수신하는 데는 소홀한 것이 아닌가, 의아하다.

가장 치명적인 것이 죽음에 대한 각성에서 그렇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는 꼴이다.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다면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은 ‘야금야금 죽어가는 셈’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에게 허용된 생명의 길이가 백년이라는 끈이라면, 살아온 나이만큼 그 끈의 길이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죽어가는 것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몇백 년이나 살 것처럼 욕망의 화신이 되어 간다. 그런데 생명의 섭리는 오묘해서 그렇게 매일매일 생명이 단축된다는 것을 망각하기 좋아하는 인간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지 수시로 죽음의 징표를 전해준다.

노화는 가장 뚜렷한 표지다. 그런데 노화의 과정은 그 변화 양상이 시간을 경과하며 매우 더디게 진행되기 때문에 자극적이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다 어느 날 앨범을 보고 최근에 찍은 사진과 몇 십 년 전에 찍은 것을 비교해 보며 비로소 노화를 실감하곤 한다.

이런 표지 말고도 우리 몸은 노화의 징표가 실체적으로 온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례는 많다.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가면 의사들의 진찰 결과는 대동소이하다. ‘노화의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는 결론이다.

어느 날 치아에 문제가 생겨 치과에 가도, 이명이 생겨 이비인후과에 가도, 시력이 나빠져 안과에 가도, 호흡에 곤란을 느껴 내과에 가도 의사들의 진찰결과는 한결같다. “칠팔십 년을 써먹었으니 장기도 고장이 생길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처럼 노화를 알려주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살아간다면, 아니 죽어간다면 그래도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험한 꼴을 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면서 몸의 어딘가 불편하면 그것을 고깝게 여겨 불행의 시작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노화의 진척 상황을 넌지시 귀띔해 주는 것으로 여겨 고마워하며 ‘생수 한 잔’으로 자신을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자폐증을 앓는 아들을 둔 문우가 있다. 그는 착한 인성을 타고난 듯이 보인다. 주변 사람이 그 누구라도 곤란한 일, 어려운 일,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이런 일상사를 목격하거나 이런 소문이 수신되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애를 쓴다. 그런 성품을 지닌 이가 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시인다움이 그의 품성과 어우러져 좋은 작품을 생산해 낸다.

그가 ‘우울한 행복’이란 시를 보내왔다. 시를 읽으며 먹먹한 가슴으로 한참을 말없이 울었다. 마흔에 이른 아들의 정신 연령은 여섯 살 아이라고 한다. 덩치는 아비보다 더 우람한데 하는 짓은 떼쟁이 어린아이다.

그런 아들과 함께 나들이하는데, 마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묵언의 시위다. 아비는 불혹의 여린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물리고,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억장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이 행복해 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우울한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의 행복감을 수신할 줄 아는 아비의 무한 사랑, 그런 부자의 애틋함에 그저 함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필자의 무력한 감청 능력이 비교되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아비로서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면, 나머지는 하늘이 알아서 아들을 돌봐줄 것”이라는, 하나 마나 한 말로 위로랍시고 하는 나의 수신 능력이 빈곤하여 한심하긴 하다.

하늘이라고 했지만, 요즈음 하늘은 다른 일로 바쁜가 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맨땅을 맨발로 걷기 열풍이 불었다. 접지[earthing]하면 몸속에 축적된 활성산소가 방전[방출]되어 건강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접지의 효과 이 외에도 숲에서 맨발로 걸어보니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다. 숲의 향기를 온몸으로 누리면서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안정된다. 맨발을 자극하는 흙의 촉감과 자극이 있어 신경계나 생체리듬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긴장시키고 이완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그보다 더 깊고 오묘한 점은 만물은 음양의 조화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그런데 그동안 너무도 먼 ‘하늘바라기’만 해 온 것이 아닌가,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땅바라기’를 해서 하늘[陽]과 땅[陰]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각성이 일었다.

우주는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무 상생은 결국 음양의 조화요, 빛과 그늘의 어울림이다. 그런 메시지는 수시로 우주에 널리 퍼져 있다. 이 메시지를 수신하면서 자신의 삶을 조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