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僧과 속俗. 같으면서 다른 세계”

시상수상詩想隨想 - 30

2023-08-28     김규원

 

 

출가하여 사물이 스스로 울 때까지

죽음을 공부하는 게

승려라며, 雪嶽堂 霧山 大宗師께서는

진공시심을 읊으셨는데

 

재가하여 허공에 거미줄 칠 때까지

목숨을 공부하는 게

시인이라며, 魚樂堂 油然無我 詩客

묘유불심을 염송하는데

 

-졸시승속僧俗 -시와 종교전문

설악당 무산 대종사 조오현 시승은 출가승으로도, 그리고 시인으로도 불세출의 뚝심을 보여주신 분이다. 그분이 남긴 말씀이나 시문[권성훈 편저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한글 선시禪詩도서출판 반디. 2016]을 찬찬히 음미하노라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출세간에 다름과 다름없음이 명확하게 그려진다.

무산 스님이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기자가 찾아가서 넌지시 물었다. 이미 속세를 떠나신 분이 굳이 세상에서 주는 상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영광이 되겠느냐는, 약간의 핀잔이 섞인 법거량法擧量인 셈이다. 법거량이란 불가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시험하기 위해 선사들이 간화선을 두고 벌리는 논쟁이다. 그러나 이 법거량을 좀 쉽게 적용한다면, “과연 저 사람이 깨달음의 경지[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시험 삼아 묻고 대답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불가에서 법거량은 논리의 차원을 뛰어넘는 경지이며, 언어적 표현만으로 그 심오한 깨침의 경지를 다 드러낼 수 없다는 점에서 함부로 아는 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산 시승과 기자와의 문답은 속세의 법거량이라 할 만하였다. 기자의 당돌한 질문에 무산 시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승려]는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속에서 죽음을 공부하는 자이지요. 그러니 승려가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말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세상 사람들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다 보니 그게 시와 닮아 있었던 모양입니다.”(김병무 홍사성 엮음설악무산의 방할)

말하자면 승려가 되어 속세의 어법과 다른 말,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과 다른 길을 제시하는 말을 하다 보니 그게 시가 되더라는 것이다. 속세의 사람들은 얻으려하고 더하려 하며, 높아지려 하고 누리려 하는데 반하여, 출가자의 말은 얻으려 말고 베풀어야 하고, 더하려 말고 비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출가자들은 한사코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궁극 점에 삶과 죽음이 있다. 속세의 인간들은 한사코 오래 살면서 현세의 쾌락을 누리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반하여, 출가자[무산 스님]세상에서 제일 즐겁고 기쁜 날이 죽는 날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이 죽으면 염불하는다비문이란 책의 끝 구절이 바로 쾌활快活, 쾌활이라는 것이다. 좋다, 좋다!”는 것이다. 모든 근심 번뇌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기쁘냐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죽는다는 소리를 안 하고, ‘[, 돌아가다]입적[入寂, 적막으로 들어가다]이라는 말을 쓴다.

필자는 한국시인협회회원이다. 한국시협에서 매년 회원들에게 테마를 제시하고 사화집 원고를 제출하라고 한다. 그 해 시대의 징표가 될 만한 주제나, 관심의 밀도가 높은 제재를 제시하여 회원들의 작품을 모집하여 사화집을 꾸린다. 2022년에는 ’ 2021년에는 ’ 2020년에는 ’ 2019년에는 시인의 주소등을 보면, 시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한 통속이면서도, 그래도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는 심결을 담아내려는 뜻을 읽을 수 있다.

금년의 테마는 시와 종교라고 한다. 이 테마를 접하고 언뜻 떠오른 생각[詩想]의 꼬투리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무산 시승의 죽음론이었다. 그러면서 조오현 시승의 깨침에서 내 나름의 패러디를 얻었다. “승려는 출가하여 산속에서 죽음을 공부하는 시인이라면, “시인은 재가하여 속세에서 죽음을 공부하는 승려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일치점은 바로 세상 사람들의 어법과는 다른 말을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승려와 시인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승려가 처한 곳은 속세와 거리를 둔 산속[절간]이며, 시인이 처한 곳은 속세의 한복판[재가]라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그리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환경의 변화감이 가장 첨예한 자연 속에 사는 승려나, 생존의 바람이 가장 뜨거운 시장 속에 사는 시인이나, 그리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또 하나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 있다면, 승려는 죽음을 통해서[공부해서] 삶을 바라보고, 시인은 삶을 통해서[공부해서] 죽음을 바라본다는 정도의 변별성이다. 이 또한 그리 다르지만은 않다. 승려는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냐를 공부해서 얻은 깨침이 바로 죽음의 기쁨이라면, 시인 역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죽는 것이냐를 공부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시는 바로 시인이 이룬 깨침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얻은 깨침이 바로 승속僧俗-시와 종교. 이것을 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승속을 넘나들 수 있는 독자의 혜안을 기대할 수밖에.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승려의 어법이 결과적으로 시의 어법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시인의 어법 또한 승려의 말씀을 닮을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당위성은 삶에서도 그렇다. 승려가 시정신에 정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제대로 된 수행이 될 것이다. 시정신의 본질이 무엇인가? 두말 할 것 없이 새로움의 새로움일 뿐이다. 깊은 사유와 미학적 표현은 시정신에 이르고자 하는 과정일 뿐이다. 시인이 수행심에 정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제대로 된 시인의 길이 될 것이다. 수행심의 본질이 무엇인가? ‘해탈과 적멸일 뿐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끝에 비로소 영원한 침묵에 든다는 것은 다시없는 수행의 미덕이다.

그 길에 이르겠다며 죽음을 공부해서 시를 낳고, 삶을 공부해서 해탈을 얻으려는, 승려나 시인이나, 선가나 속세나 무엇이 다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