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딧, 믿음
크레딧, 믿음
  • 신영배
  • 승인 2024.04.03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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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대표
김정기 대표

시인은 노래했다. 겨울이 아니라 봄을 노래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올해도 어김없이 들꽃들이 봄소식을 전한다. 노랫말처럼 매년 약속이나 한 듯 개나리와 진달래, 늦은 복사꽃까지 봉긋하고 터지기 시작했다.

시민은 노래한다. 22대 총선을 노래한다. 뜻있는 참여로 꽃 잔치이기를 노래한다. 지난달 28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13일간의 봄 잔치. 5, 6일 이틀간 사전투표다. 지금 여기저기서 약속이 풍년이다. 「전주-새만금 고속철 신설」 등 지역 개발과 '대통령 탄핵', '빨갱이와 친일' 등 큰 프레임까지 다양한 공약(公約)이 넘쳐난다.

“방송 끝부분에 스태프 자막 스크롤 올리고, 마지막에 연출 000 넣는 것은 ’나‘ 라는 사람이 만든 작품이요∼ 하고 시청자에게 말하는 것이지. 한마디로 내 자신감을 표현하고, 믿어달라 이름 석자에 명예를 걸었다 할까.” 방송사 PD 초짜 시절 선배에게 들은 얘기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스크롤하고 ’자막 인‘이라 콜(call)하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크레딧이 된 거 같애.” “영화에서도 마지막 올라가는 자막을 크레딧이라 허잖아.” 감탄사와 함께 신선한 충격이었다.

보통 일일이나 주간 프로그램 등 생방송(Live)에는 방송 끝부분에 ‘크레딧 타이틀’을 잘 안 쓴다. 로컬방송에선 마지막 시간 맞추기가 제법 어렵다. 자막 송출이 짧아도 30초 이상이다. 그저 「제작:KBS」로 대체하고 프로그램명으로 마친다. 평소 집밥처럼 요리사나 재료를 명명하지 않는다고 하면 맞을까? 그렇다고 연출자가 시청자에 대한 정성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크레딧(Credit). 좁게는 신용거래, 신용도라는 뜻이다. 넓게는 신용, 신뢰의 의미로 쓰인다. “Believe나 Trust와는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관계다.”라고 나무위키는 전한다. 현재 우리 생활에서 손쉽게, 널리 사용하는 화폐가 크레딧 카드이다. 신용카드(Credit Card)다.

1997년 IMF 시절. 김대중 정부는 경기부양을 목적으로 신용카드 발행을 크게 늘렸다. 플라스틱 화폐로 현금이 없어도 되니 마냥 쓰는 시민들도 나왔다. 물가도 오르고, 개인 채무로 한정치산자가 속출했다. 정부는 뒷수습에 애를 먹었다. 또 코로나 펜더믹 때 세계 각국 정부는 ’발등의 불 끄기‘에 바빴다. 천문학적인 재정지출로 시민들의 삶을 대충은 추스렸다. 하지만 넘쳐나는 돈 때문에 계속해서 금리를 올려야만 했다. 서민들의 생활이 곤궁해진 것은 이때부터이다. 

선거판에 크레딧과 같이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게 배신이다. 배신(背信). 등 배, 믿을 신이다. 믿음에 대해 등을 돌렸다, ’신의를 저버렸다‘는 뜻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지적해주지 않는다. 그저 나중에, 나중에 알뿐이다. 여기저기서 배신타령 난리다.

옛날 옛적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시절. “얼래 깔래 OO이는 신용쟁이래요. 얼래 깔래∼” 이렇게 아이들은 한 친구를 놓고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예뻐하고 신뢰하는 듯하면 놀려댔다. “난 아닌디. 아녀∼”하고 놀림당하던 아이는 울고불고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선생님의 믿음 크레딧, 사랑에 대한 시기 질투였다. 아이는 선생님이 주시는 사랑도, 믿음도 부끄러웠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경제이론에 이른바 ’차선의 법칙(次善, The theory of Second)‘이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최선(Best)에 이르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경제학 원론 시간에 처음 들었다. 항상 1등만 강요하던 시절,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요즘 정치권 뉴스에서는 차선보다는 차악(次惡)에 관심이 많다. 차선과 차악. 공격적으로 무언가 이루어야 할 때 큰 욕심보다는 차선을 선택하는 게 맞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방어해야 할 때 차악이 유용할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A 후보자나 B나 그저 그렇기에 투표장에 가기가 싫다고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달리 다른 답이 없다. 최선의 후보가 없어 투표를 포기한다면 그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그래서 경제 영역과 달리 선거에는 최악을 피해, 조금은 덜 나쁜 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차악을 선택해야만 한다.

방송 마지막 크레딧처럼. “나를 우리 공동체에 띄우니 시청자들이, 유권자들이 평가해주세요.”하고 자신을 당당하게 내보이는 후보. 길고 긴 롱 테이크(long take) 기법처럼 커트(cut)나 편집이 들어가지 않은 후보. 봄날 소풍 가는 기분으로 주인을 챙겨주는 충직한 후보였음 좋겠다. 잔뜩 흐린 날, ‘텃밭에 쥐 들락거리듯이’ 하는 후보는 결코 아니다.

선거는 크레딧이다. 커다란 ‘기호판 크레딧’을 든 봄날 오색 꽃 잔치다. 후보와 유권자 우리네 결혼식 같은 봄꽃 큰 잔치다. 4·10 총선은 우리들의 약속, 바로 믿음이다.

 

#김정기(前 KBS전주 편성제작국장). KBS PD. 1994년 다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시작으로 ‘지역문화’와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다. 3.1절 기획 ‘무주촌 사람들’ ‘키르기즈 아리랑’. ‘한지’ ‘’백제의 노래‘ 등 30여 편의 다큐멘터리와 ’아침마당‘ ’6시내고향‘ 등 TV교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금은 오로지 전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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