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만화 속 주인공을 꿈꾸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벌써 4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한국전통미술 발전에 이바지하고 대중과의 공감과 소통에 힘쓰겠습니다.”
사람과 세상 ③ 진안에 미술관 연 청산 김권희 화백
산골에 열린 김권희 미술관
국도 26호선을 따라 진안읍에서 장수쪽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김권희 미술관’이라고 간판이 붙은 하얀 2층 건물을 만난다. 건물 왼쪽에 넓은 계단을 올라 2층 미술관에 들어서면 김 화백의 그림 41점이 걸려있어 그의 미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산골에 미술관을 열어 미술계 및 지역의 화제가 된, 한국화가 김권희(59) 화백은 40여 년 미술 인생을 조명하면서 대중과의 교감과 저변 확대를 위해 진안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9월, 미술 오지 진안읍 물곡리에 미술관이 문을 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 3만도 안 되는 한적한 농촌에 웬 미술관” 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통념적 의구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갤러리에 들러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주민들도 궁금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김 화백은 조금도 서둘지 않는다고 한다. 미술관이 뭔지 궁금하게 생각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만화 속 주인공에서 전문 미술인이 되다>
김 화백은 초등학교 시절에 만화 속 주인공을 꿈꾸며 만화 그리기에 빠졌다. 고교 시절,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인식하고 미술대학에 진학하면서 마침내 그 꿈을 이루게 됐다.
김 화백은 입문 초기에 문인화를 비롯해 전통적인 남화정신과 기법, 사상을 토대로 한국의 자연을 형상화하는 구상 작품을 주로 하다가 전통미술의 근간을 버리지 않은 채 응용성(비구상)을 접목하는 실험적 시도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미술계에서는 그를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그러면서도 전통미술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작가로 평한다.
<대중과 호흡하는 미술이 되어야 한다>
김 화백은 40여 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림이 생업이기도 했지만 급속한 산업화와 사회 구조의 변화 때문에 잠시 외도(?)를 하다가 곧 돌아왔다.
그는 대한민국예술대전에서의 특‧입선 수 회, 각종 공모전에서의 많은 수상 경력과 15회 이상의 개인전 개최 외에도 각종 그룹전, 기획전 등에 초대되면서 많은 작품을 출품했다.
이제는 중견작가로서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미술이 애호가나 동호인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전통미술의 대중화 일환으로 미술관을 개관해 대중이 다가오는 길을 열었다.
그는 “불모지에 이제 신작로를 내는 기분이다. 대중과의 호흡은 한국화든 서양화든 그림을 내거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며 “일반인이 꼭 전문성을 갖출 필요는 없다. 작품 감상만으로도 행복을 찾을 수 있고, 창작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앞으로 각종 기획전 및 전시회를 자주 열며 대중과 소통하겠다.”고 했다.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한국화>
그의 비구상 작품들은 현대의 각박한 생활을 벗어나 자연으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함께 살아가자는 의미의 상생이 주테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일상적인 통념에서 인간이 살아가야할 길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의 고민은 다수의 산수화 작품과 특히 2009년 국전 특선작인 상생Ⅱ에 녹아들었는데, 구상과 비구상을 가미한 기법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삶의 고단함을 자연을 빗대어 표현했다는 평가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김 화백은 “전통적인 구상 작품들도 중요하지만, 비구상이 갖는 매력도 한국화에 있어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며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를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험정신의 표본, 상생 시리즈/실경산수화
그의 작가적 실험정신은 상생 시리즈에서 표출됐는데, 당시 평론가들은 “작가의 존립과 직결되는 그의 실험적 시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며 “그와 같은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김 화백이 한국화의 새 장을 열게 됐다는 데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실경산수화 역시 세밀한 관찰력과 상상력이 혼재한 화폭 운용으로 인해 먹의 운용이나 운필에 있어서 정통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미술을 사랑할 줄 아는 미술인이었으면 한다>
미술인으로서 창작 및 협회 활동을 하면서 전통미술 중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좋아서 시작한 것이 40여 년이 지났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선 강단에 서다 보면, 대다수 미술 지망생들이 미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전통미술을 외면하고 기술만을 습득해 전문인이 되고자 욕심이 앞서 중도 포기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연유로, 미술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이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응용미술, 산업미술, 산업디자인 등의 상용미술이 각광받는 세태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미술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김 화백은 미술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미술의 순수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열정이 넘칠 때, 비로소 미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아가 전문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진안=이삼진 기자